서낭당과 성황당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사전은 성황당(城隍堂)을 「'서낭당'의 원말」로 풀었고, 같은 사전에서 원말은 「변하기 전의 본디의 말」이에요. 무엇인지는 서낭당 쪽에 적혀 있어요.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집」이고, 서낭신은 「토지와 마을을 지켜 준다는 신」이에요. 성황과 서낭, 성황신과 서낭신, 성황제와 서낭제, 성황단과 서낭단도 모두 같은 원말 관계로 실려 있어요.
차이는 사전 밖에서 나와요.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신앙사전의 '서낭당'(김명자 집필), '서낭신'(황루시 집필), '성황제'(송화섭 집필) 항목을 함께 읽으면, 마을 어귀와 고갯마루의 돌무더기, 서낭나무, 당집에서 개인과 마을이 빌던 서낭과 고려와 조선에서 고을 치소에 성황사를 두고 관리와 향리가 지낸 읍치 성황제가 따로 설명돼 있어요. 그리고 '서낭'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는 항목마다 학설이 달라요. 산신을 뜻하는 산왕(山王)에서 왔다는 설, 중국 성황(城隍)에서 왔다는 설, 몽골 오보에서 전해졌다는 설, 여러 요소가 섞였다는 설이 함께 실려 있어요. 이 글은 어느 학설이 맞는지 고르지 않아요.
이 글이 옮기는 것은 사전과 민속사전이 적은 내용이에요. 서낭신이 실제로 마을을 지킨다거나 서낭당에서 빌면 일이 풀린다는 말은 하지 않아요. 자료들도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섬겼다는 기록으로 적었어요.
이번에 연 자료는 표준국어대사전 검색 결과 15개 낱말,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2개 낱말,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제목 검색 2번과 항목 11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 5개예요. 모두 2026년 10월 19일 오후 4시 25분에서 4시 29분 사이에 원문을 받아 읽었어요.
서낭당 성황당 차이, 사전에서는 한 낱말의 두 모양이에요
표준국어대사전 검색 결과를 낱말 짝으로 놓으면 이래요. 왼쪽이 성황 쪽, 오른쪽이 서낭 쪽이에요.
| 성황 쪽 낱말 | 사전 풀이 | 서낭 쪽 낱말 | 사전 풀이 |
|---|---|---|---|
| 성황당(城隍堂) | '서낭당'의 원말 | 서낭당 | 서낭신을 모신 집 (≒국사당) |
| 성황(城隍) | '서낭'의 원말 | 서낭 | 서낭신이 붙어 있다는 나무 (첫째 뜻) |
| 성황신(城隍神) | '서낭신'의 원말 | 서낭신 | 토지와 마을을 지켜 준다는 신 |
| 성황제(城隍祭) | '서낭제'의 원말 | 서낭제 | 서낭신에게 지내는 제사 |
| 성황단(城隍壇) | '서낭단'의 원말 | 서낭단 | 서낭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 |
표를 보면 규칙이 하나 보여요. 뜻풀이는 모두 서낭 쪽 낱말에 있고, 성황 쪽 낱말은 「'서낭-'의 원말」 한 줄로만 풀려 있어요. 사전의 두 풀이를 그대로 이으면 성황당이 변하기 전의 말이고 서낭당은 바뀐 뒤의 말이에요. 뜻풀이를 단 쪽은 서낭당이에요.
표 밖의 낱말도 몇 개 찾아봤어요. 서낭굿은 「서낭신을 위하는 굿. 무당이 음식을 차려 놓고 노래와 춤으로 신을 즐겁게 하여 복을 빈다」로 실려 있어요. '성황사'와 '선왕당'은 검색 결과가 0개였어요. 국사당은 첫째 뜻이 「서낭신을 모신 집」이고 서낭당과 같은 말로 적혀 있어요.
우리말샘 '성황당' 검색에는 「'서낭당'의 원말」 말고 둘째 뜻이 하나 더 있어요. 정비석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방한준 감독이 만들어 1939년에 개봉한 영화예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 소설 「성황당」을 1937년 『조선일보』에 실린 정비석의 단편소설로 적었어요. 실린 날짜는 같은 항목 안에서 두 가지로 적혀 있어요. 정의와 요약은 1월 14일부터 26일까지, 참고문헌의 원전 표기는 1월 19일부터 2월 2일까지예요.
백과사전과 민속사전에 적힌 여러 이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당' 항목(1995년 김태곤 집필, 최종수정 2022년 12월 11일)은 정의를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神堂). 성황당.」으로 적고, 내용 요약에 「성황당이라고도 한다」고 했어요. 같은 사전 '서낭' 항목(1995년 김헌선 집필, 최종수정 2023년 7월 19일)도 서낭을 「선왕, 성황(城隍)이라고도 한다」고 적었어요.
민속사전은 이름이 섞여 쓰이는 모습을 지역별로 적었어요.
-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당'(김명자 집필)은 중부지방에서 서낭당과 선왕당, 경북 영천 등지에서 천왕당이라 부른다고 적었어요. 돌무더기와 당나무 형태의 서낭당은 평안도에서 국수당, 함경도에서 국시당이라 부른다고 했어요.
- 같은 사전 '서낭제'(강성복 집필)는 중부지방에서는 대체로 서낭이라는 이름이 쓰이지만, 강원도와 그에 맞닿은 경북, 충북 산간에서는 서낭과 성황이 「혼효되어 있다」고 했어요. 이 지역 서낭제의 축문, 당집에 모신 위패, 옛 문헌에는 성황(城隍)이나 선왕(仙王)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적었어요.
- 같은 사전의 다른 '서낭제' 항목(김승찬 집필)은 축문이나 위패에 적힌 서낭의 한자 표기로 城隍, 城皇, 聖皇, 仙王, 仙央, 仙娘, 先王, 誠隍, 仙皇 아홉 가지를 들었어요.
- 한국세시풍속사전 '성황제' 항목은 본문이 참조로 적힌 「서낭제(-祭)」 한 줄뿐이에요. 성황제를 서낭제 항목으로 넘긴 셈이에요.
그런데 이름이 섞여 쓰인다는 것과 내용이 같다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다음 절에서 보듯이 몇몇 항목은 이름만 섞였을 뿐 내용은 다르다고 봤어요.
이름은 섞였어도, 마을의 서낭과 고을의 성황은 따로 설명해요
민속사전과 백과사전 항목에 적힌 두 모습을 먼저 표로 놓을게요.
| 구분 | 마을의 서낭(당) | 고을의 성황(사, 제) |
|---|---|---|
| 자리 | 마을 어귀, 고갯마루, 산허리, 한길 옆 | 고려 때 진과 성 같은 군사 요새, 12세기 중반 이후 주·군·현의 행정 치소 |
| 모습 | 돌무더기와 서낭나무, 당집, 입석 | 성황사와 위판 |
| 지낸 사람 | 지나가는 사람 개인, 마을 주민 | 고려의 지방 세력과 관리, 조선의 수령(국행성황제), 향리·무당·지역 주민(민간성황제) |
| 근거 항목 | '서낭당'(김명자), '서낭신'(황루시), 백과사전 '서낭당'(김태곤) | '성황제'(송화섭), '서낭신'(황루시) |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당' 항목은 서낭당을 「마을 어귀나 고갯말, 산허리 등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로 정의했어요. 돌무더기와 나무가 함께 있는 형태는 점차 사라져 남은 곳이 드물고, 오래된 나무에 당집이 붙어 있거나 당집만 있는 서낭당을 마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사례가 흔하다고 했어요. 이 항목은 돌무더기 서낭당은 주로 개인적인 기원과, 당집 서낭당은 마을공동체 신앙과 이어진다고 봤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당' 항목은 형태를 다섯 가지로 나눴어요. 서낭나무 곁에 잡석을 쌓은 누석단이 있고 나무에 백지나 오색 비단 헝겊을 매단 형태, 누석단만 있는 형태, 서낭나무에 헝겊만 매단 형태,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형태, 자연석을 세운 입석 형태예요. 이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첫째 형태라고 적었어요.
고을의 성황은 사정이 달라요. 한국민속신앙사전 '성황제' 항목은 성황제를 「읍치(邑治) 또는 지역, 마을 공동체 단위로 성황신에게 행하는 제의」로 정의했어요. 고려의 성황사는 처음에 진(津)과 성(城) 같은 군사 요새에 세워졌고, 12세기 중반 이후 주, 군, 현의 행정 치소에 설치되기 시작했다고 했어요. 조선 태조 원년의 사전 개편안은 나라 제사로 허락된 고을 성황을 「모주(某州)·모군(某郡)의 성황지신」이라 부르고 위판을 두어 수령이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옮겼어요. 이 항목은 조선의 성황제가 관리가 지내는 국행성황제와 향리, 무당, 지역 주민이 이끄는 민간성황제로 이원화되어 있었고, 두 제의가 조선 후기까지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적었어요. 정의에 「마을 공동체 단위」가 함께 들어 있듯이, 같은 항목은 읍치성황제가 촌락성황제로 정착하면서 자연마을에 성황사를 짓고 성황신의 화상을 모시는 풍속이 민간에 널리 퍼졌다고도 적었어요.
같은 사전 '서낭신' 항목(황루시 집필)은 조선의 성황을 국행성황과 읍치성황으로 나누고, 읍치성황은 관에서 주재했다고 적었어요.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국 328개 군·현에 325개 성황사가 있었다고 했고, 강릉단오제를 읍치성황제의 내용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승하는 축제로 들었어요. 그런데 같은 책의 성황사 수를 김승찬 집필 '서낭제' 항목은 336개로 적었어요. 이 글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원문을 열지 않아서 어느 숫자가 맞는지 확인하지 못했어요.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 국사성황을 모신 곳은 이름부터 성황사예요. 한국민속신앙사전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당' 항목(황루시 집필)은 이 건물을 「'城隍祠'라는 현판이 걸린 17㎡ 정도의 3칸 목조건물」로 적었어요. 오래 이어진 고을 성황제의 예도 있어요. 같은 사전 '순창성황제' 항목(김갑동 집필)은 순창성황제를 「1214년부터 1823년까지 600여 년 동안 전라도 순창에서 거행된 지역수호신에 대한 제사의식」으로 정의했어요. 이 내용은 「성황대신사적」이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고, 제사는 매년 음력 5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 열렸다고 했어요.
이름이 섞인 것을 두고 내용까지 같다고 볼지는 항목마다 달라요. 황루시 집필 '서낭신' 항목은 서낭과 성황이 민간에서 명칭이 혼용되어 왔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성황은 관인성황의 성격을 유지하였고, 민간에서는 명칭만 혼용했을 뿐 실제 내용은 전혀 다르다고 볼 수 있다」고 적었어요. 김승찬 집필 '서낭제' 항목도 서낭신앙의 성역인 서낭당과 고려 중기 이후 군과 현에 설치한 성황사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김명자 집필 '서낭당' 항목도 중국의 성황신앙과 한국의 서낭신앙은 「다르지만」 발음이 비슷해 식자층은 서낭을 한자 성황(城隍)으로, 민간은 서낭으로 쓰게 됐고, 오늘날 두 신앙이 섞여 의미가 같게 되었다고 「한다」로 옮겼어요. 그런 다음 성황은 식자층의 한자 표기 쪽에 비중이 있을 뿐 「재래의 서낭신앙 내용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적었어요. 다만 조선시대 고을에서 관이 주도한 성황신앙에는 중국 성황 요소가 더해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어요.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당'(김태곤 집필)은 두 이름을 가르지 않고 써요.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을 서낭신앙 전래의 시초로 적었고, 조선의 서낭을 「국행(國行)서낭」과 민간의 서낭으로 나눴어요. 황루시 집필 '서낭신'이 백악성황, 송악성황으로 적은 조선 초의 신도 이 항목에서는 「백악(白岳)서낭과 송악(松岳)서낭」이에요.
서낭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항목마다 학설이 달라요
표준국어대사전은 낱말 사이의 관계만 적었고, 어원 학설은 이번에 본 검색 결과 화면에 없었어요. 학설은 민속사전과 백과사전 항목에 있어요. 항목별로 적힌 그대로 옮겼어요.
| 항목 (사전, 집필자) | 적은 학설 | 그 항목의 판단 |
|---|---|---|
| '서낭당' (한국민속신앙사전, 김명자) | 산왕·천왕·상왕 유래설, 자생설, 몽골 오보 전래설, 중국 성황 영향설 |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성황은 식자층의 한자 표기 쪽에 비중이 있다고 본다. 오보 전래 시기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반쯤으로 볼 수 있다 |
| '서낭' (한국민속신앙사전, 류종목) | 산왕 유래설, 오보 영향, 천신·산신과 오보, 중국 성황 네 요소의 복합 | 산왕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 성황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는 잘못이다 |
| '서낭신' (한국민속신앙사전, 황루시) | 산왕 유래설, 성황 유래설, 이능화의 성황 이입설, 손진태·조지훈·김태곤의 설(원래 있던 신앙에 후대의 성황이 복합되었고, 이때 서낭신앙은 몽골 오보에서 기원했다고 여김) | 어원은 뚜렷이 밝혀진 것이 없다 |
| '서낭신' (한국민속신앙사전, 이영식) | 산왕 유래설, 성황 유래설 | 기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
| '서낭제' (한국민속신앙사전, 강성복) | 원시 경계표설, 석전설, 오보 전래설, 중국 성황 유입설, 마씨 돌무덤 민간설 | 서낭은 고유 명칭, 성황은 중국에서 전래된 이름으로 푸는 것이 통설이다. 이렇다 할 정설은 없다 |
| '서낭제' (한국민속신앙사전, 김승찬) | 중국 성황 발생설, 고유 신앙에 성황이라는 표기만 붙었다는 설, 『고려사』의 '선랑(仙郞)'이 '서낭'으로 음운변천했다는 추정 | 산왕의 음운변화로 보기는 어렵다. 중국 성황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
| '서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헌선) | 고유 신앙설, 중국 성황 이입설, 오보 전래설 | 어느 것이 타당한지 단정할 수 없다. 고유 신앙에 성황이나 오보가 들어와 습합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
| '서낭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종승) | 외부유입설, 내부전래설 | 대체로 내부전래설에 무게를 둔다 |
표에서 두 학설은 정면으로 엇갈려요. 산왕설은 류종목 집필 '서낭'이 「산왕(山王)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며 산이 '선'이 되어 '선왕', 다시 '서낭'으로 정착했을 것이라고 풀었어요. 김승찬 집필 '서낭제'는 배에도 이물서낭, 고물서낭, 기계서낭이 있다는 점을 들어 산왕의 음운변화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어요. 같은 항목은 『고려사』에 나오는 '선랑(仙郞)'이 '서낭'으로 음운변천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고 적었어요. 선랑이 어떤 신앙 행사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단서도 함께 달았어요.
중국 성황 기원설은 이능화가 『조선무속고』에서 폈다고 황루시 집필 '서낭신'과 백과사전 '서낭'이 함께 적었어요. 이 견해를 류종목 집필 '서낭'은 「잘못」이라 했고, 김승찬 집필 '서낭제'는 조선 국가 제단과 강원도 서낭당의 위패 배치가 다르다는 점을 들어 성황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고 적었어요. 송화섭 집필 '성황제'는 유래에 대한 주장에 차이가 있다고 밝힌 뒤, 그 항목에서는 중국에서 전래했다고 여기는 성황신앙을 살핀다고 적었어요.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의 말도 갈리는 대목이에요. 김명자 집필 '서낭당' 항목에 따르면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우리나라 도처의 고갯마루에는 선왕당(先王堂)이 있는데 이것은 성황이 잘못된 것」이라 했고, 항목은 이 말을 「잘못된 해석」이라고 적었어요. 백과사전 '서낭당'은 서낭이 경계를 표시하려고,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려고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짙다고 적었어요.
국립국어원 사전의 원말 풀이와 겹쳐 보면 한 가지가 더 보여요. 사전의 풀이대로라면 성황이 변하기 전의 말이고 서낭이 바뀐 뒤의 말이에요. 그런데 민속사전에는 서낭이 산왕에서 왔다고 보는 항목과, 고유 신앙의 서낭을 한자로 성황이라 적었다고 보는 항목이 함께 있어요. 낱말 사전의 원말 표시와 일부 민속사전 항목의 어원 설명은 방향이 달라요. 이 글은 어느 쪽이 맞는지 정하지 않아요.
처음 나온 기록, 자료마다 고르는 기록이 달라요
성황당이나 성황사가 처음 나온 기록을 물으면 자료마다 다른 것을 들어요.
| 자료 (집필자) | 처음으로 든 것 | 말의 세기 |
|---|---|---|
| 한국민속신앙사전 '성황제' (송화섭) | 996년(성종 15)에 성황당 기록이 처음 등장 | 「처음으로 등장한다」 |
|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제' (김승찬) | 성황당이라는 이름은 『고려사』에서 처음 나타남. 996년 안종 욱의 유언과 1055년(문종 9) 선덕진 신성의 성황신사를 듦 | 「처음 나타난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제' (양종승) | 문헌에 성황이라는 용어가 쓰인 최초의 사례는 고려. 같은 두 기록을 듦 | 「최초의 사례」 |
|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신' (황루시) | 성황이 들어온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둔 것이 처음 | 「처음이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당' (김태곤) | 서낭신앙의 전래는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둔 것이 시초 | 요약은 「시초이다」, 본문은 「시초라 한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 (김헌선) | 서낭신의 내력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 신사를 설치한 데서 찾을 수 있음 | 「찾을 수 있다」 |
두 연도는 서로 다른 일을 가리켜요. 김승찬 집필 '서낭제' 항목이 옮긴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996년 기록은 귀양 간 안종 욱이 죽을 때 아들에게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매장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고 남긴 유언이에요. 성황당이라는 이름이 이 유언에 나와요. 1055년(문종 9) 3월 기록은 선덕진 신성에 성황신사를 두고 숭위(崇威)라는 칭호를 내리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내용이에요.
그러니 「처음」은 무엇을 세느냐에 따라 달라요. 위 항목들이 든 기록만 놓고 보면 성황당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기록은 996년이고, 성황사를 둔 기록은 문종 때예요. 김태곤, 황루시, 김헌선 집필 항목은 「문종 때」라고만 적고 연도는 적지 않았어요. 장소 이름도 백과사전 '서낭당'과 '서낭', 민속사전 '서낭신'은 신성진(新城鎭)으로, 김승찬 집필 '서낭제'와 백과사전 '서낭제'는 선덕진(宣德鎭) 신성(新城)으로 적었어요.
이 글은 『고려사』 원문을 직접 열지 못했어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고려사』를 찾으려 했지만 이번에 쓴 검색 주소로는 결과 화면이 열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연도와 인용문은 모두 위 항목들이 옮긴 것이에요. 이 항목들보다 더 이른 기록이 있는지도 찾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글은 어느 것도 「가장 이른 기록」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요.
돌을 얹고 침을 뱉는 풍속, 기록에 적힌 그대로
서낭당 앞을 지나며 돌을 얹거나 침을 뱉는 풍속은 여러 항목에 기록돼 있어요. 기록된 풍속으로만 옮길게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당'(김태곤)은 이곳을 지날 때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고 적었어요. 오가는 사람들이 돌, 나무, 오색 천 등을 놓고 지나다녔다고도 했어요.
-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신'(황루시)도 서낭당 앞을 지날 때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고 적었어요.
-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당'(김명자)은 돌이나 천, 비단 조각이 본래 신에게 바치는 공헌물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풀었어요. 돌을 던지고 천을 거는 풍속은 개인적인 기원을 할 때 나타나고, 마을공동체가 섬기는 서낭당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 침을 뱉게 된 까닭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어요. 강태공의 처 마씨가 엎지른 물을 다시 담지 못하고 죽어 서낭당이 되었다는 전설이 대표적이에요. 김명자 집필 '서낭당'은 이런 유래담을 「후대인의 부회(附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성복 집필 '서낭제'는 「견강부회(牽强附會)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었어요.
- 이영식 집필 '서낭신'은 고갯마루 돌무더기에 돌을 하나 던지고 침을 세 번 뱉으며 빌던 서낭도 흔치 않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고갯마루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적었어요. 강성복 집필 '서낭제'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새 길을 내고 좁은 길을 넓히면서 서낭당 돌무더기가 헐리고 신목이 베어졌다고 적었어요.
이번에 읽은 항목들은 이 풍속을 속신이나 전설로 적었고, 실제로 운이 좋아지는지를 따진 문장은 없었어요. 이 글도 효과를 말하지 않아요.
서낭굿과 서낭제는 언제 지냈나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류종목)은 서낭굿을 일반적으로 3년마다 한 번 음력 정초에 날을 받아 하고, 지방에 따라 음력 10월에 하는 곳도 있다고 적었어요. 서낭굿이 없는 해에도 음력 정월이나 10월에 날을 받아 간단한 공동 제의를 올린다고 했어요. 같은 항목은 서낭굿을 별신굿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고 적었어요. 2026년 음력 10월이 양력으로 언제인지는 상달 고사 날짜를 민속 기록과 맞춰 본 글에 정리해 뒀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제'(1995년 양종승 집필, 최종수정 2023년 5월 3일)는 서낭제를 정월, 삼월에서 오월, 구월 가운데 날을 골라 마을 서낭당에서 지내는 마을 제사로 정의했어요. 같은 항목은 서낭제를 동제, 서낭굿, 서낭거리라고도 한다고 적었어요. 서낭굿처럼 이름에 굿이 든 의례가 국가무형유산 목록에 몇 종목 올라 있는지는 굿 종류를 국가무형유산 목록에서 세어 본 글에 따로 세어 뒀어요.
기록을 읽을 때 짚어 둘 것
- 같은 제목의 항목이 둘씩 있어요. 한국민속신앙사전에는 '서낭신'이 황루시 집필과 이영식 집필로, '서낭제'가 강성복 집필과 김승찬 집필로 따로 있어요. 같은 제목이라도 집필자가 다르면 학설 판단이 달라서, 이 글은 항목마다 집필자를 붙여 적었어요.
- 백과사전 항목은 집필 시점과 최종수정일이 달라요. '서낭당'은 1995년 김태곤 집필에 2022년 12월 11일, '서낭'은 1995년 김헌선 집필에 2023년 7월 19일, '서낭제'는 1995년 양종승 집필에 2023년 5월 3일, 소설 '성황당'은 2023년 오태영 집필에 2024년 9월 29일 최종수정이에요. 이 네 항목에는 모두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다는 안내가 붙어 있어요.
- 표준국어대사전은 검색 결과 화면에 보인 뜻풀이만 옮겼어요. 항목 상세 화면은 이번에 열리지 않았어요.
이 글이 확인하지 않은 것
-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오주연문장전산고』, 『조선무속고』 원문은 열지 않았어요. 996년과 1055년 기록, 325개와 336개라는 성황사 수, 이규경의 말은 모두 위 항목들이 옮긴 것이에요.
- 몽골 오보와 중국 성황신앙에 관한 원자료는 보지 않았어요.
- 국립민속박물관 제목 검색에서 '서낭'은 22건, '성황'은 16건이 나왔어요. 이 가운데 본문을 읽은 것은 위에 이름을 적은 항목들이고, 지역별 서낭제와 성황제 항목은 순창성황제와 대관령 성황사 말고는 읽지 않았어요.
- 지금 남아 있는 서낭당이나 성황당이 어디에 있는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몇 곳인지는 조회하지 않았어요.
정리하면
- 서낭당 성황당 차이를 표준국어대사전으로 보면 둘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사전은 성황당을 「'서낭당'의 원말」로, 원말을 「변하기 전의 본디의 말」로 풀었어요.
- 성황, 성황신, 성황제, 성황단도 각각 서낭, 서낭신, 서낭제, 서낭단의 원말이고, 뜻풀이는 서낭 쪽 낱말에 있어요.
- 민속사전 항목들은 마을 어귀 돌무더기와 당집의 서낭과, 고을 치소에 성황사를 두고 관리와 향리가 지낸 읍치 성황제를 나눠 설명해요. 황루시, 김승찬 집필 항목은 이름만 섞였을 뿐 내용은 다르다고 봤고, 김명자 집필 항목도 재래 서낭신앙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고 봤어요. 백과사전 '서낭당'(김태곤 집필)은 두 이름을 가르지 않고 썼어요.
- 서낭의 어원은 산왕설, 중국 성황 기원설, 몽골 오보 전래설, 여러 요소의 복합설이 항목마다 다르게 실려 있고, 강성복 집필 '서낭제'는 이렇다 할 정설이 없다고 적었어요.
- 처음으로 드는 기록도 자료마다 달라요. 996년 성황당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유언을 드는 항목과 고려 문종 때 신성진 성황사를 드는 항목이 있어요.
- 서낭당에 돌을 얹고 침을 뱉는 풍속은 속신으로 기록돼 있고, 마씨 전설 같은 유래담은 두 항목이 후대에 덧붙인 설명이라고 적었어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서낭당, 성황당, 서낭, 성황, 서낭신, 성황신, 국사당, 서낭제, 성황제, 서낭단, 성황단, 서낭굿, 성황사, 선왕당, 원말 검색 결과와 우리말샘 '성황당', '서낭당' 검색 결과,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당', '서낭', '서낭신' 두 항목, '서낭제' 두 항목, '성황제', '순창성황제',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당', 한국세시풍속사전 '서낭제', '성황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낭당', '서낭', '서낭제', '성황당', '성황설화' 항목에서 옮겼어요. 조회 시점은 2026년 10월 19일 오후 4시 25분에서 4시 29분 사이예요.